자동 전화응답기에 이별을 전하고 떠난 남자 ‘이반’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그에게 메세지를 남기지만 그에게 콜백이 오지 않아 미칠 지경인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페페’의 이야기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님의 1988년 작품입니다. 코미디 장르의 영화로 낯익은 배우들의 젊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어느 날, 전화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연인의 이별 메세지를 듣게 된 페페는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연인이었던 이반에게 전할 말이 있었던 페페는 어떻게 해서든 그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에게 메세지를 남기지만 그는 연락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짐을 여행가방에 넣어 집 앞에 놓아달라는 메세지만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그의 부인이 사는 집에 메세지를 남기기도 하고, 그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면서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그의 연락은 오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의 방문만 늘어갑니다. 과연 페페는 이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반에게 전하고 싶던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주인공 페페
페페와 이반은 성우로 같은 작품에서도 연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별 메세지를 받은 후, 출근해서 녹음을 하는데 사랑을 속삭이는 작품 속 이반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다가 기절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이반과 통화하기 위해 큰 맘을 먹고 이반의 부인이 사는 집으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습니다. 전부인도 아니고, 부인이라니. 페페는 당당하게 이반의 부인에게 당신 남편과 헤어졌다, 하지만 꼭 해야할 말이 있으니 통화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반은 어디 있는걸까요? 그의 부인도 그는 너랑 살고 있지 않느냐며 화를 내는데, 페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페페의 집도 떠났는데 부인의 집에도 없는 것 같고, 녹음 스튜디오에서도 자신의 분량은 다 마치고 떠났기에 그의 거취를 알 수 없어 페페는 환장(?)할 노릇이 되어 신경질을 부리다가 침대도 태워먹고, 전화기도 던져서 고장내고, 이반을 보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그가 좋아하던 토마토 쥬스를 잔뜩 만들어서 그 안에 수면제를 몇 십 알 타 넣기도 합니다.
도대체 거의 할아버지 같은 이반의 매력은 무엇이길래 부인도, 페페도, 또다른 내연녀도 그에게 빠져든 것인지.. 부인과 이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페페에게도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날 보는 게 불편할 것 같아서 메세지를 남겨, 그러니 그저 내 짐만 여행가방에 넣어서 집 밖에 내다 놔주면 좋겠어’ 라고 자동응답기에 이별을 고하는 남자인데요. 페페 집 앞 전화부스에서 (그놈의) 전화 메세지를 남기다가 부인을 보고 숨거나 영화 말미에 또다른 내연녀 앞에서 페페를 붙잡고 미련을 남기는 찌질한 이반을 보면서.. ’아,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영화 내내 이반과 연락이 닿질않아 미칠 지경인 것 같았던 페페는, 마지막에 공항에서 이반을 만나지만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그를 보내줍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페페역의 카르멘 미우라는 전에 리뷰했던 ‘커먼 웰스’에서 부동산 중개인 여주인공으로도 봤었던 배우인데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범상치 않은 주인공을 연기했습니다. 집에 연인의 아들이 나타나고, 테러리스트와 동거한 친구가 경찰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들이닥쳐도, 머릿속에는 그저 이반과 연락할 방법만을 찾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페페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페페가 신고 나오는 빨간색 단화 운동화를 구입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외 등장인물
- 이반의 부인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있다가 복수를 하기 위해 완치된 것처럼 위장을 하고 퇴원을 해서는 아주 멋진 클래식한 투피스를 입고서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서 공항으로 달려가 남편을 향해서 망설임없이 총을 발사해 버립니다. 그리고 경찰에게 붙잡힌 후 말합니다.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내줘요, 거기가 내 집이야.‘ 등장 분량이 많진 않았지만 엄청난 임팩트와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 젊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이반의 아들역으로 나오고 그의 약혼녀로 로시 드 팔마가 나옵니다. 로시 드 팔마의 캐릭터는 거의 수면상태인 상황이었다가 마지막에 공항에서 돌아온 페페와 대화하면서 영화 내내 페페가 그토록 이반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그녀가 듣는 장면이 재밌었습니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보고 난 후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화면이 예뻤고, 항당무계하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배우들 의상이 굉장히 화려하고(모카포트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나옵니다.) 특히 페페는 장면마다 옷을 많이 갈아입기 때문에 의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1988년도 작품이라서 추억의 자동응답기가 영화의 아주 중요한 장치로 등장합니다. 오랜만에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 상대방과 연락이 닿질 않거나 엊갈려서 답답하던 그 예전 감성을 느낄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연인에게 갑작스레 이별통보를 받고(그것도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가 된 페페는 이반을 그리워하다가 죽이고 싶어하다가 결국 그를 보내주고서야 평안을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반의 아들을 만나고 그가 성인이 될때까지 아들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이반과 부인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해도 개의치 않는 남편으로서의 이반의 모습을 차차 깨달아 간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그가 죽을까봐 공항까지 달려가서 그의 목숨을 구하는데 그 행동은 이반의 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살인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반을 구하고 싶었을 수 있겠다 하구요.
그나저나 이반이 또다른 내연녀와 여행을 가기 위해 탑승하려는 스톡홀롬행 비행기는 테러 위협이 있는 비행기였는데.. 과연 어떻게 됐을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