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화권 작가들의 추리 소설을 읽던 중, 흥미로운 책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지웨이란 작가의 <탐정 혹은 살인자>라는 추리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뻔한 플롯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작가 소개글에 <탐정 혹은 살인자>는 작가의 첫 소설로 발매한 지 두 달만에 5쇄를 찍었다는 내용을 보고 흥미를 느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지웨이란 작가는 1954년생으로 대만의 현대 연극사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타이완 대학교의 연극학과 교수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소설의 주인공 또한 대학 교수로 저명한 극작가 입니다.
** 스포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탐정 혹은 살인자 >
저명한 극작가이자 대학 교수인 ‘우청’은 자신이 쓴 극본으로 만든 연극이 폭망한 후 구이산다오의 어느 해물탕 집에서 뒷풀이를 합니다. 그곳에서 독설을 포함한 엄청나게 끔직한 주사를 부리게 되고,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는 은퇴를 선언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워룽제 197번지 골목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탐정 사무실을 개업하게 됩니다. 탐정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탐정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저 한량처럼 인근 공원을 산책하거나 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청은 어쩌다 첫 의뢰를 성공하고, 뉴스에서는 대만 최초의 연쇄 살인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습니다.
탐정으로서 호기심에 사건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던 중 경찰은 용의자로 우청을 지목합니다. 피해자들과 우청은 거주지, 자주 산책가는 공원이 일치하고 몇 몇 목격자도 우청의 얼굴을 봤다고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꼼짝없이 연쇄살인범이 될 뻔 했던 우청은 첫 의뢰자였던 ‘천 여사’의 증언으로 혐의를 벗어나게 되나, 여전히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음해하고 있다고 판단한 우청은 자신이 직접 범인을 색출하고자 경찰의 조사에 참여합니다.
그러다 모든 원흉이 구이산다오의 그 해물탕 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청을 동경함과 동시에 이상한 신념을 가졌던 대만 최초의 연쇄살인범, ‘쑤훙즈’는 구이산다오의 뒷풀이에서 우청을 만나게 되고 독설을 하는 그를 보고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청이 돌연 다음날 자신의 주사를 사과하고 은퇴를 한 후 워룽제 197번지 골목에 숨어들어 갔을 때, 그는 우청에게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우청을 깨우쳐 주고자 그의 주변에서 연쇄살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우청과 쑤훙즈
주인공 우청은 공황 장애 환자입니다. 고등학생 때, 밤에 자다가 발작을 일으킨 이후로 계속 증상을 앓고 있었습니다. 처방 받은 약을 잘 먹고 있으니 자신이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질환에 대해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구이산다오의 뒷풀이 장소에서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폭발해 주변 사람들에게 끔찍한 독설을 날리게 됩니다. 평소에도 신랄한 말솜씨를 뽐냈던 그였기에 사람들은 그가 오늘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며 욕을 했습니다. 실은 공황 장애 증상이 발현된 것 뿐이었는데 우청의 상황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를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필이면 그 날 삐뚤어진 종교 관념과 오만한 자아로 똘똘 뭉친 쑤훙즈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우청의 독설을 듣고 자신과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고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뒷풀이에서 동료들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똥고집의 우청은 그의 공황 장애를 알리는 대신 학교를 그만두고 연극계를 은퇴하는 선택을 합니다. 아내와도 별거를 하고 가족들의 손길도 거부한 채 갑자기 탐정이 되겠다며 홀로 워룽제 197번지 건물에 방을 얻습니다. 하지만 주변인들에게 그렇게나 숨기고 싶었던 우청의 공황 장애 질환은 그가 연쇄살인범의 혐의를 받게 되면서 티비를 통해 전국에 알려집니다.
‘대만 최초의 연쇄살인범’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쑤훙즈는 머리가 무척 좋은 학생으로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학생이었습니다. 너무 머리가 좋은 나머지 종교에 심취하는데 그 종교의 교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해석을 믿으며 잘못된 신념을 갖게됩니다.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의 우두머리 같습니다. 얼핏보면 우청과 쑤훙즈는 닮은 것도 같았습니다. 세상은 바보고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비슷하지만 우청은 그런 자신의 태도를 숨기지 않아서 평판이 좋지 못했고, 쑤훙즈는 자신의 생각을 잘 숨기는 사람으로 사람들은 그가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재미있는 포인트 였습니다.
오직 우청을 ‘깨우쳐 주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우청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우청의 실리콘 얼굴을 만들어서 목격자를 만들기까지 하는 쑤훙즈. 심지어 여장을 하고 여자 행세를 하며 그의 집 앞에 이사 오기까지 하는 미친놈이지만 추리 소설 속의 살인자 캐릭터들로 생각해 봤을 때 그냥 순수하게 미친놈(?)이라서 외려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 추리 소설에도 범인이라고 하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등의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는 ‘소시오패스 = 살인자’ 같은 느낌이라서요. 쑤훙즈를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적인 정신적인 면으로 해석하고 표현하지 않은 점이 좋았습니다. 쑤훙즈는 그냥 광인이고 광인은 광인일 뿐, 이유를 만들어 주지 않아서 좋았어요.
중화권 추리 소설의 재미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을 읽고 중화권 추리 소설에 대한 재미를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찬호께이 작가를 비롯해 여러 중화권 작가들의 팬분들이 이미 한국에 많이 있으시더라구요. 나만 몰랐던 유명인들이었습니다. 찬호께이 작가를 필두로 주하오후이 작가의 <사악한 최면술사>도 읽어보고 지웨이란 작가의 <탐정 혹은 살인자>까지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탐정 혹은 살인자>는 특히 재밌게 읽어서 책 소개에 나온 어느 독자의 후기처럼 저도 시리즈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해봅니다. 베이커가의 셜록 홈즈처럼 ‘워룽제 197번지의 탐정 우청’ 이렇게 시리즈로 나온다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아직은 후속작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청은 독설가(우청 본인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만)에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지만 어떻게 보면 소심하고 인정미도 가득한 독특한 캐릭터라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주하오후이 작가의 <사악한 최면술사>의 경우에 소설 주인공인 ‘뤄페이 형사’의 시리즈가 있을 만큼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인 것 같았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긴 하지만.. 중후반까지 이야기가 잘 쌓아지면서 흑막이 누구인지는 초반에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그 동안의 트릭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너무 흥미롭게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막판에 클라이막스를 장식해야 할 결말에서 단지 십 여장의 분량으로 뤄페이 형사가 설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점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도주 혹은 자살을 방조할 목적으로 담당 형사를 최면으로 잠 재운 사람에게 심지어는 범죄의 증거까지 넘겨주고 처분하게 한 것도 모자라 차까지 태워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다니. 이게 마지막이라니..
하여튼 <사악한 최면술사>를 읽고 뒤숭숭해진 마음을 <탐정 혹은 살인자>로 잘 치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