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필로소퍼] vol.25 갈등을 받아들이는 연습

뉴필로소퍼 vol.25 <갈등을 받아들이는 연습>은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작용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갈등 없이는 변화도 없다.”라고 말한 필립 슬레이더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이번 호에서는 갈등 자체를 없애려고 하기 보다는 갈등이 우리 사회에서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점을 말하며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유튜브에 나오는 것처럼 현인의 말을 읊거나 명상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이 마냥 두려워할 대상이거나 나쁜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 흥미롭게 읽은 칼럼 한 두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선한 두 이익의 충돌이다

뉴필로소퍼 한국판 강희재 편집장은 Editor’s Letter에서 ’천국의 아이러니‘란 제목으로 미드 <굿 플레이스>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주인공이 천국에 가서 유명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들은 모두 행복한 굿플레이스에 있으면서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드라마 속 천국 사람들이 무기력해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살아갈 이유’라는 엔진으로서의 ‘갈등’의 부재가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책 <비망록> 중 한 구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 선한 두 이익의 충돌이다”라는 인용으로 갈등이 우리 삶에 필요한 부분 중 하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하자면 ‘프로스트의 글처럼 선한 두 존재는 각자의 이익과 정당성에 맞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충돌이 마냥 비극적이고 피해야 하는 상항으로만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갈등 속에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여 얻게 되는 삶의 기술이 세상을 좀 더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더 필요’하다고 말하며 ‘강력한 정신의 코어 근육’을 길러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탄탄한 영혼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빌어줍니다.

강희재 편집장의 말처럼 모두가 강력한 정신의 코어 근육을 만들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내적 갈등 internal conflict

안 좋은 버릇을 없애거나 새로운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했지만 한순간 나약한 마음이 들어 실패한 적이 있는가?

갑자기 첫 문장부터 가슴을 후벼파는 질문이었습니다. 제 대답은 “네! 항상요.” 입니다. 지금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계속 제목만 만들어놓고 며칠째 작성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며, 액상음료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 습관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마시는 일이 하루의 루틴 중 하나입니다. 매 주 교회에 가서 회개를 하지만 매 주 반복되다보니 제가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최근에는 그 회개는 관뒀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의 아이스크림 예시를 들어 욕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파티에서 손님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줄 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하나 더 먹기로 할 때 남의 것을 뺏어 우악스럽게 먹는다는 법은 없으며 ‘침착하고 우아하게 유혹에 굴복’하여 먹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감정 혹은 욕망에도 저마다의 논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욕망에 굴복했다 라고 하면 두 무릎을 꿇은 듯 굴욕적인 느낌이었는데 ‘침착하고 우아하게 굴복했다’ 라고도 볼 수 있다니.. 너무 새로운 관점처럼 느껴졌습니다.

칼럼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성과 감정은 단순한 이분법적 요소라기 보다 밀접하게 관련된 요소로, 통제력이란 두 요소간의 적당한 비율을 찾는 힘’이라는 글이 갈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적 갈등으로 보자면 자신의 이성과 감정의 적당한 비율을 찾아 균형을 잡아야할 문제이고, 외적으로 봐도 타인 또는 사회와 나 자신 사이에 알맞은 비율을 찾아 균형을 잡으면 되는 것으로 ‘갈등’ 그자체는 악당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과 자유 사이를 배회하는 철학자

영국의 작가이자 기술철학자인 ‘톰 챗필드’의 글입니다. 뉴필로소퍼를 여러권 읽으면서 종종 등장하는 작가님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내용의 글을 쓰신다고 생각하는 분들 중 한 분입니다. 읽기 수월한 글이면서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저같은 일반인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로또에 당첨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로 글이 시작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도 있고 가족에게 혹은 기부단체에게 기부를 할 수도 있고 그런 상상을 하다가 결국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낼 지도 모릅니다. 철학의 역사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밝히려는 시도들이라고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관용과 편협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철학자인 데릭 파핏과 버나드 윌리엄스의 대립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타인에 불행을 볼 때,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선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파핏의 주장과 그에 반하는 윌리엄스의 주장은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의 이유를 논할 수 없다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에게 기부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더라도 그가 기부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부를 하면 좋다는 것은 ‘도덕’일 뿐이고, 기부를 할지 말지는 부자의 ‘자유’이니까요. 파핏의 주장은 성선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는 윌리엄스의 말처럼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주관성으로 행동하기에 선한 일에 무조건 행동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글에서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글을 인용합니니다.

“만약 우리가 편협한 사람들에게까지 무제한으로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편협한 사람들의 맹공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람들과 관용 정신 자체가 모두 사라지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편협함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특히 요즘 우리 사회는 갈등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여러가지 갈등 이슈가 넘치는것 같습니다. 파핏이 본다면 통탄할 일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지만 그의 말처럼 자신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으면 충분히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용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칼 포퍼의 말처럼 ‘관용의 이름으로 편협함을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뉴필로소퍼의 다른 리뷰도 궁금하시다면, <뉴피로소퍼 vol.9>도 읽어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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