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을 재밌게 읽었던 차라, 찬호께이 작가의 작품들을 도장깨기 하듯이 읽어보고자 선택한 작품이 <기억나지 않음 형사>입니다. 제목이 좀 특이한 것 같아서 도전해봤습니다. 형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수사는 어떻게 하나?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도전해 봤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2003년에 활동하던 형사가 어느날 아침에 깨어났더니 2009년이 되었다고? 멀티버스를 다루는 내용인지, 아니면 시간 여행자를 얘기하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습니다. 찬호께이 작가의 작품은 읽는 중간에는 결말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외에도 같은 작가의 <풍선인간>도 재밌게 읽었는데 비교적 단순한 내용이라 복잡한 추리없이 가볍게 읽고 싶은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 아래부터는 스포의 내용이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
홍콩의 둥청 아파트에서 부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형사는 현장을 둘러보면서 생각합니다. 임산부인 부인과 남편을 이토록 잔혹하게 살해할 수 있는 범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범죄 현장의 잔상으로 꿈을 꾸다가 자신의 차량에서 깨어나는 ‘쉬유이’ 형사.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픕니다. 아스피린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는 경찰서로 출근을 하는데, 경찰서의 풍경이 어제와 사뭇 다릅니다. 더욱이 경찰서 안내데스크 뒤쪽의 날짜는 2009년 3월 15일 입니다. 무슨 일이지? 어제까지 분명 2003년 이었는데?
그 와중에 쉬유이 형사와 취재 약속이 있다고 찾아온 잡지사 기자 ‘아친’을 만납니다. 6년 전, 둥청 아파트에서 발생했던 살인 사건이 영화화 되면서 관계자를 취재하는 중이라고 설명합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치의의 진단이 있었기에, 형사는 자신의 기억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그녀와 동행합니다. 아친과 방문한 곳은 둥청 살인사건의 피해자 뤼슈란의 언니, 뤼후이메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전에는 둥청 아파트에 살았었지만 사건이 있은 후 조카를 데리고 교외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뤼후이메이의 기억을 토대로 한 사건의 전말은, 뤼슈란의 남편 장위안다는 불륜 상대가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 ‘리젠성’은 폭력적인 사람으로 아내의 외도 상대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다가 상대를 해주지 않자 밤에 몰래 집으로 들어가 그들 부부를 살해하고 도망쳤다는 내용입니다. 거기다 더해서 그는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가 차량 사고를 일으켜 자신을 포함한 수 많은 인명 사고까지 낸 흉악범입니다. 하지만 ‘형사의 감’이 발동한 쉬유이는 아무래도 진범인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2003년 쉬유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병원에 상담을 다니는 ‘옌즈청’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스턴트맨으로 어린시절 눈 앞에서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는 장면을 본 후, 마음의 문을 닫고 살지만 사회 생활을 하면서는 멀쩡한 사람인 듯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은 사람은 리젠성으로 그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고 사고로 사망하자 진범을 찾기위해 같은 병원에 다니고 있던 쉬유이 형사에게 접근합니다.
뤼후이메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쉬유이는 사건을 다시 조사하기로 합니다. 쉬유이가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친도 자신의 취재를 위해서 그와 함께 합니다. 다음 조사 대상은 리젠성의 아내 ‘리징루’ 였습니다. 그녀는 리젠성이 폭력적인 사람이지만 여자에게는 손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리젠성이 청룡도장 사람들과 종종 만났으며 ‘아옌‘이라는 사람과 친했다고 말해주고는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리젠성의 수첩을 쉬유이에게 전해줍니다.
청룡도장에서 아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쉬유이는 리젠성이 아니라 아옌이 진범이 아닐까 추정하고 그를 만나러 영화 세트장으로 가지만 간발의 차로 그를 놓치게 됩니다. 하지만 아옌의 사물함에서 탐정에게 의뢰를 한 흔적과 리후이메이와 그녀의 조카 정융안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아옌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해 뤼후이메이의 집으로 출발합니다. 뤼후이메이에게 진범이 노리고 있다고 설명하고 경찰에 신고할 것은 권하지만, 그녀는 진범임을 확신하고 나서 신고하고 싶다며 아옌이라는 사람의 사진이라도 확인 받고자 합니다. 아친이 자신의 잡지사에 연락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아옌의 사진을 팩스로 요청합니다.
팩스 사진을 확인한 아친은 다른 사람의 사진이 왔다며 화를 내고 쉬유이가 화장실에 가는 사이에 그를 화장실에 가두고 뤼후이메이와 융안을 데리고 도망칩니다. 인근의 언덕 끝까지 도망갔지만 쉬유이가 바로 뒤쫓아옵니다. 아친은 아까 받은 팩스 사진을 쉬유이에게 던지며 그를 ’아옌‘이라고 부릅니다. 얼떨떨한 쉬유이의 주위를 경찰들이 포위하고 그는 허리춤에서 꺼낸 권총을 다잡으려다 경찰의 총에 맞고 쓰러집니다.
수술을 마치고 눈을 뜬 쉬유이에게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쉬유이에게 당신은 쉬유이가 아니라 옌즈청이라고 압려줍니다. 2003년 둥청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쉬유이’역으로 출연했던 그가 촬영 중에 사고로 머리를 다쳤었는데, 치료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만성 경뇌막하혈종이 발생되어 기억상실 증상에 더해 기억 조작 증상까지 나타나 자신이 ‘사건 발생 당시의 쉬유이 형사’라고 착각하게 된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혈종은 치료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진다는 의사의 설명과 함께 진짜 ’쉬유이’가 나타나 ‘너는 둥청 아파트 사건 당시에 스턴트 일로 다른 장소에 있었던 점이 이미 당시에 확인 됐었다’고, 옌즈청이 쉬유이로서 추리한 내용을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다행히 옌즈청의 소동으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고 아친과 뤼후이메이에게도 설명을 잘 해놨으니 회복하는데만 집중하라고 격려를 해주고 떠납니다.
아직도 자신이 쉬유이가 아니라 옌즈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가운데 아옌은 둥청 아파트 사건의 범인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그는 병실 밖을 지키는 사람을 피해서 창문을 통해 아래층의 아친 병실로 들어갔습니다. 창문을 통해 병실로 들이닥친 아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아친의 입을 막아 조용히 시키자 누군가 아친의 병실로 들어옵니다. 침대 커튼을 제끼고 칼을 들어올린 사람은 뤼후이메이였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습니다. 사건 당일 리젠성이 찾아와 불륜 사실을 알리자 뤼슈란과 정위안다는 크게 싸움이 나고, 부부싸움을 피해 뤼후이메이는 조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추정컨데 경미한 정신 착란 증상이 있었던 후이메이는 평소에 행복하게 살고 있던 동생에게 시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 부부싸움을 하던 그들은 보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그들을 살해했고, 아파트 밖에서 그 집을 주시하던 리젠성이 비명 소리를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지문과 발자국을 남기고 범인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리젠성은 무고함을 주장할 새도 없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진상은 어둠에 묻히고 말았고, 리후이메이는 그 사건을 취재하는 아친에게 단서를 들키게 될까봐 아친마저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주요 등장인물은 쉬유이, 옌즈청(아옌), 아친, 뤼후이메이, 리젠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건 현장에 대해서 서술하는 첫 장면은 소설 마지막에 보면 옌즈청이 해당 씬을 연기하는 장면이었는데요, 만성 경뇌막하혈종이 생긴 아옌에게는 며칠 전에 수사한 장면으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쉬유이와 옌즈청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나눠서 진행되는데, 결말까지 보고나니 거의 옌즈청 혼자만의 시점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실제의 쉬유이에게도 트라우마로 인한 상처가 있었기에 옌즈청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거든요.
쉬유이와 아친이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진범이 아닐까 추정하며 아옌을 추적해 나갈 때 묘사되는 아옌은 너무나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무술도장에서 단시간에 무술을 습득하고 많은 대회에서 상을 휩쓸만큼 강하며, 정신과 의사가 트라우마로 인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보고 언젠가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회고하는 장면이 더해지면서 순간의 분노로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옌즈청의 실체가 밝혀지고 나서 병실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옌즈청에게는 안쓰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복 동생을 임신한 새어머니가 될 사람을 눈 앞에서 사고로 모두 잃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어린 아옌에게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주던 사람이 리젠성이었습니다. 그런 리젠성마저 사고고 잃고 그가 살인범으로 몰리자 혼자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머리에 혈종이 생기면서 자신을 쉬유이 형사라고 착각하면서도 또다시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리젠성 또한, 사람들한테 귀신이라고 불릴만큼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여자나 노인에게 손을 댈 만큼의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아옌을 사고 현장에서 구해주고 천애고아가 된 그가 엇나가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따듯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 지분은 쉬유이와 옌즈청이 나눠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쉬유이 시점의 이야기 중 상당량이 옌즈청의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옌즈청의 직업(스턴트맨)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도 위험한 격투 장면 등은 주인공으로 분장한 스턴트맨이 해내니까요. 그런 것처럼 둥청 아파트 사건의 진범도 실제 쉬유이 형사가 아니라 옌즈청이 밝혀냈기 때문에 더 그런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중, 옌즈청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에게 너무 많은 배경을 주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쉬유이와 아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영웅과 악인‘ 처럼 무게감 있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였는데, 진범인 뤼후이메이를 포함해서 주변 인물의 설명이 많았다면 이야기가 산만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사실, 결말의 뤼후이메이의 정신착란 증상은 갑자기?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착란 증상으로 인해 소설이 더욱 재미있었기에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습니다.
찬호께이 작가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고 새삼 찬호께이 작가의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잔훙즈’ 작가의 추천사 표현 그대로, 이 작품은 정교한 트릭과 후반부에 연이어 펼쳐지는 반전의 묘미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너무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고 앞으로 읽게 될 찬호께이 작가의 작품들이 너무 기대됩니다.
개인적으로, 전에 홍콩으로 여행갔을 때 봤던 경찰서 전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특히 더 재미있게 봤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많이 봤던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라는 시리즈 영화에서 봤던 해경 경찰서를 여행 중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엄청 기뻤던 기억이 있었는데, 소설 초반에 홍콩의 경찰서 이야기가 나와서 괜히 반가웠습니다. (너무 TMI였네요..)
** 일본, 대만, 홍콩 작가들의 소설집 <쾌-젓가락 괴담 경연> 블로그도 읽어봐 주세요~